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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공 신도비

수성최씨 시조 문혜공 묘소

수성최씨 시조 문혜공(영규) 묘소 전경

사당 전경
시조 문혜공은 경순왕의 후손이시다.
우리 수성최씨의 시조 휘(諱) 영규(永奎) 시호(諡號)문혜공(文惠公)은 본성(本姓)이 김(金)씨로서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고려 고종조에 탄생 하시어 원종조에 등과 하시고 충렬왕 28년(서기1302년) 임인(壬寅)에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을 선치(善治)하신 공이 높다 하여 최(崔)로 사성(賜姓)하시고 수성백(隋城伯)으로 봉(封) 하심으로써 수성최씨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시조 문혜공께서는 경순왕의 17세손, 혹은 13세손으로 많은 비명(碑銘)과 옛날 여러 족보에 기록되어 왔다. 그러다가 근자에 경순왕의 넷째 아드님이신 은열공묘정(殷說公墓庭)에서 태화와 정구 부자의 지석(誌石)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계대(系代)에 혼선이 빚어지게 되었다. 정사보(丁巳譜)를 보면 태화공 子로 정구공(正矩公) 손자 숙승공(叔承公)으로 되어 있으나 태화공과 숙승공은 형제간이므로 우리 시조 문혜공 영규께서는 경순왕의 11세손이 되시는 분이다. 대부분 종중에서는 문혜공께서 경순왕 13세로 인정하고 있으나,수성군파는 17세손, 안동김씨대종회에서는 11세손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수성최씨는 경순왕을 비조(鼻祖)로하여 다음 표와 같이 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 세대는 안동 김씨 족보 편찬 위원회에서 최근 주장하는 내용이다. 대부분 종중에서는 문혜공께서 경순왕 13세로 인정하고 있으나,수성군파는 17세손, 안동김씨대종회에서는 11세손으로 주장하고 있다.
1. 17세 주장 : 은열 - 계령 - 한공 - 경보 - 세린 - 봉모 - 태서 - 경손 - 휘 - 이청 - 의화 - 민 - 효인 - 현경 - 준 - 영규
2. 13세 주장 : 은열 - 숙승 - 원강 - 문웅 - 일긍 - 이청 - 의화 - 민성 - 효인 - 현경 - 준 - 영규
3. 11세 주장 : 은열 - 숙승 - 일긍 - 이청 - 의화 - 민성 - 효인 - 현경 - 준 - 영규

수성최씨 시조 휘 영규(隋城崔氏 始祖 諱 永奎)

수성최씨(隋城崔氏) 시조(始祖) 휘(諱) 영규(永奎) 수성백(隋城伯) 문혜공(文惠公)께서 본계(本系)는 경주(慶州) 김(金)씨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後裔)이시며, 고려(高麗) 8대왕 현종(顯宗)의 외예(外裔)이시다. 고(考)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휘(諱) 준(悛)이시고, 비(妣)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서 판삼사 좌사(判三司 左使) 창(敞)의 여(女)이시다.

공(公)께서는 문장(文章)과 재덕(才德)이 탁월(卓越)하시어 고려 원종(元宗) 2년 신유[辛酉:1261]에 문과(文科)에 오르셔서 숭록대부(崇祿大夫) 남조전서(南曹典書)로 보문각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시고, 서경(西京)의 유수(留守)로 계시면서 휼륭한 방법으로 교도(敎導)하여 문화(文化)가 크게 일어났으며, 원종왕(元宗王)은 공(公)을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으로 대접하시어 사신(史臣)이 명현(名賢)등의 말로 기록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품자(禀資)의 탁월(卓越)하심과 덕행(德行)이 돈독(敦篤)하시며 문장(文章)이 당세(當世)에 떨치셨다. (보문각 대제학(대경) -정2품 조선조에 집현전으로 바뀜.( 다른 기록에는 南部典書로 되어 있기도 하나 南曹典書의 오기 같음. 남조전서는 예부이며 전서 품계는 판서임)
(경서(經書) 강론 외에 정책 자료의 저술, 기로연(耆老宴)의 의식제도 및 중국 육조(六朝)·당(唐)·오대(五代)의 사료집 교정 등을 맡아보았다. 또한 당나라 태종 때의 여러 신하들과 정치상의 이론을 분류한 책을 주해하고, 중국 사서(史書) 등을 교감하였다. 그리고 이를 주현(州縣)에 분송, 조인(調印)해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에 수주(水州) 지역에 풍속(風俗)이 퇴폐(頹廢)하고 윤상(倫常)이 혼매(昏昧)하므로 왕이 심히 근심하시니 공(公)께서 자청(自請)하여 수주(水州)에 부임하시어 백성들에게 충효(忠孝)의 책무(責務)를 가르치고 인의(仁義)로 인도(引導)하여 일년(一年)이 못되어 윤리(倫理)와 풍속(風俗)이 크게 변화하고 효제지향(孝悌之鄕)으로 화하니, 왕이 가상(嘉賞)히 여기시어 충렬왕(忠烈王) 28년 임인[壬寅:1302]에 그 공덕(功德)이 높아 최(崔)로 사성(賜姓)하시고 수성백(隋城伯)으로 봉(封)하시니 수성최씨(隋城崔氏)가 비로소 시작 되었다.

후에 호남 안무사(湖南 按撫使)로 나가셨다가 졸(卒)하시니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로 내려주셨다. 수주(水州)의 백성들이 공(公)의 덕의(德義)를 흠모하여 스스로 어량천(魚良川) 삼봉산(三峯山) 아래 병좌원(丙坐原)에 장례(葬禮)를 모시고 매년 절일(節日)에 관리(官吏)들이 제사를 올리니 그때에 윤시랑(尹侍郞) 보(普)의 애사(哀詞)에 찬양(讚揚)을 극진히 하였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천서씨(利川徐氏) 시중랑(侍中郞) 문한(文漢)의 여(女)이시고,장자(長子)는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정당문학 찬성사(政堂文學 贊成事) 휘(諱) 흡(洽), 차자(次子)는 밀직학사(密直學士) 휘(諱) 필(泌)이시다.

묘소(墓所)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 81-1 병좌원(丙坐原)

참고 문헌(參考 文獻)
1.경주김씨 족보(慶州金氏 族譜), 안동김씨 족보(安東金氏 族譜).
2.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서기1934년 5월 30일 발행

수성백 문혜공 신도비명 (隋城伯 文惠公 神道碑銘)

隋城伯文惠公神道碑銘幷序
嗚呼此水原之三峰丙坐原即高麗隋城伯崔公衣履之藏也墓前一片石尙足以使後人指點而至若遺蹟未有所
記雖其子孫多在傍近崇奉甚謹而亦無徵焉則累百載之下見其泯沒而爲之傷䀌者有幾人哉今公後孫博考其
內外族系譜所載而錄成一呇以示余是猶可以諗夫永世也公諱英奎元宗二年登文科爲寶文閣大卿留守西京
敎導有方儒化蔚興忠烈王時水州一域氓俗蠢頑全昧倫常王甚憂之公以位望之重慨然有意於敷文敎革陋俗
自請爲戶長訓迪其居民一切以課忠責孝爲務不期年彝倫克叙頑俗丕變王大加嘉將二十八年壬寅以其功德
之崔巍賜姓以崔封爵以伯階崇祿官典書後出爲湖南按撫使以卒諡文惠公水之民慕公德義於其卒也乃各出
力占此幽兆而靷葬每歲節日邑吏相率設祭當時尹侍郞普有哀辭極其贊揚至以元宗待以伊周史臣記以名賢
等語稱之若 禀質之卓異德行之純篤文章事業之震耀當世者亦有家傳之言而惜乎無以眇綿作昞 公本系
金氏羅王溥之十七世孫也高祖翰林直學士敏成曾祖翰林學士兵部尙書孝印祖左政丞忠順公玄慶考贊成事
悛妣王氏判三司左使敞女配利川徐氏侍中郞文漢女有二男長洽政堂文學贊成事次泌密直學士無嗣洽二男
元凱中侍郞平章事文凱宗簿令元凱一子策判典校少尹靑松監務文凱二子善漢城少尹義戶曹參判策一子涇
司正善二子世溫郡守始仕我朝仲溫府使義二子水山郡事末山司直涇長男有臨武兵曹參判以 世祖朝敵愾
功封隋城君諡安襄公於公爲五代而最長且顯自公至今殆數十世後裔甚多不能盡錄公嫡長孫道健歲修一祭
禮且將樹石墓徑誠甚善矣而來請余文者公之十六代孫宗述應台也噫今當 聖明之世隋城改號爲華城而其
士民最被敎澤公諸孫之克擧其昔所未遑者尤豈無興感於斯哉公之幽堂在此而遇此時者其亦不偶也歟銘曰
粵在麗朝猗公巍德儼臨水鄕篤其訓迪克叙彝倫丕變虽俗位望益重賜姓封爵名留異代像想徽蹟往事茫茫
雲水與白宜爾居民瞻式幽宅有屹豊碑永世不泐
崇政大夫議政府右賛成兼 世子貳師德殷宋煥箕撰
杞溪兪漢芝篆
通政大夫行仁川都護府使 昌原黃運祚書
崇禎紀元後三庚申二月 日立 十五代孫聖集校檢

아... 이곳 수원(水原)의 삼봉산(三峰山) 병좌원(丙坐原)은 곧 고려(高麗) 수성백(隋城伯 최공(崔公)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묘 앞의 한쪽 상석(床石)이 오히려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이 자리임을 알게 하고 있으나, 유적(遺跡)의 기록이 없는데 이르러서는
비록 그 자손(子孫)들이 있으면서 정성으로 받들었으나 또한 증험(證驗)이 없으니 수백년(數百年)이 흐른 오늘 그 없어진 것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제 공(公)의 후손(後孫)이 그 내외족(內外族)의 계보(系譜)에 실려 있는 것을 널리 참고하여
하나로 모아 나에게 보이니 이것이 오히려 영원토록 후세(後世)에 알리는 것이다.
공(公)의 휘(諱)는 영규(永奎)시니 원종(元宗) 2년에 문과(文科)에 올라 보문각대경(寶文閣大卿)이 되시고,
서경(西京)에 유수(留守)로 계시면서, 옳은 방법으로 교도(敎導)하시니 유교(儒敎)의 문화(文化)가 크게 일어났다.
충렬왕(忠烈王)때에 수주(水州)지역이 풍속(風俗)이 퇴폐(頹廢)하고, 윤상(倫常)이 혼매(昏昧)하므로
왕(王)이 심히 근심하시거늘 공(公)께서 지위(地位)와 명망(名望)이 크심에도 문교(文敎)로써 퇴폐(頹廢)된
풍속을 바로 잡고자 호장(戶長)이 될 것을 자청(自請)하시어 백성에게 충효(忠孝)의 책무(責務)로써 가르치신지
기년(朞年)도 못되어 윤리(倫理)와 풍속이 크게 변하니 왕(王)이 가상히 여기시어 28년 임인(壬寅)에 그 공덕(功德)이
높음을 최(崔)로써 사성(賜姓)하시고, 백(伯)으로써 작위(爵位)를 봉(封)하시며, 숭록관전서(崇祿官典書)로 계급(階級)하시고,
후에 호남안무사(湖南按撫使)로 나가셨다가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로 내려주셨다.
수주(水州)의 백성들이 공의 덕의(德義)를 흠모하여 돌아가심에 각자 힘을 합하여 묘지(墓地)를 가리어 장사(葬事)하고,
매년 절일(節日)에 관리(官吏)들이 제사를 올리니 그때에 윤시랑(尹侍郞) 보(普)의 애사(哀詞)에 찬양을 극진히 하고,
원종(元宗)이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으로 대접하였으며, 사신(史臣)이 명현(名賢)등의 말로 기록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품자(禀資)의 탁월(卓越)하심과, 덕행(德行)의 돈독(敦篤)하심과,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당세(當世)에 떨치신 것을
또한 집안의 전(傳)하는 말이 있으나, 조금이라도 더 밝힐 수 없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공(公)의 본계(本系)는 김(金)씨로 신라왕(新羅王) 부(傅)의 17세 손이시다. 고조(高祖)는 한림학사(翰林學士) 민성(敏成)이시고,
증조(曾祖)는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상서(兵部尙書) 효인(孝印)이시고, 조(祖)는 좌정승(左政丞) 충순공(忠順公) 현경(玄慶)이시며,
고(考)는 찬성사(贊成事) 준(悛) 이시고, 비(妣) 왕(王)씨는 판삼사(判三司) 좌사(左使) 창(敞)의 여(女)이시며,
배(配) 이천(利川) 서(徐)씨는 시중랑(侍中郞) 문한(文漢)의 여(女)로 이남(二男)을 두시니 장자(長子) 흡(洽)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찬성사(贊成事)이시고,
차자(次子) 필(泌)은 밀직학사(密直學士)로 후사(後嗣)가 없으셨다. 흡(洽)의 이남(二男)중에 원개(元凱)는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이시고,
문개(文凱)는 종부령(宗簿令)이시며, 원개(元凱)의 일자(一子)인 책(策)은 판전교(判典校) 소윤(小尹) 청송감무(靑松監務)이시고,
문개(文凱)의 이자(二子)중에 선(善)은 아조(我朝)에 처음 벼슬하여 한성소윤(漢城小尹)이시며, 의(義)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이시고,
책(策)의 일자(一子)에 경(涇)은 사정(司正)이시고, 선(善)의 이자(二子)중에 세온(世溫)은 군수(郡守)이시며,
중온(仲溫)은 부사(府使)이시다. 의(義)의 이자(이(二子)중에 수산(水山)은 군사(郡事)시고, 말산(末山)은 사직(司直)이시며,
경(涇)의 장남(長男) 유림(有臨)은 무병조참판(武兵曹參判)으로 세조조(世祖朝)에 적개공(敵愾功)으로 수성군(隋城君)에 봉(封)해지셨고,
시호(諡號)를 안양공(安襄公)이라 하시니 공(公)의 오대(五代)가 되시며, 가장 길게 현달(顯達) 하셨다.
공(公)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십세(數十世)로 후손들이 많아서 다 기록은 못하였으나, 공(公)의 적장손(嫡長孫)
도건(道健)이 해마다 제례(祭禮)를 올리고, 또 수석(樹石)과 묘경(墓徑)을 받들었으니, 그 정성이 대단히 좋았다.
나에게 와서 글을 청한 것은 공(公)의 16대손 종술(宗述)과 응태(應台)였다.
슬프다. 지금 성명(聖明)의 시대를 당하여 수성(隋城)이라는 이름을 고쳐 화성(華城)이라고 하니
거기에 사민(士民)들이 가장 교화(敎化)의 혜택(惠澤)을 입었다. 공(公)의 모든 후손들이
그 옛적을 거론할 겨를이 없으니 어찌 이에 느낌이 없겠는가?
공(公)의 유당(幽堂)이 이 땅에 있음에 이때를 만난 것 그 또한 우연(偶然)이 아니겠는가?
기록한 글에 이르기를 고려(高麗) 조정(朝廷)에 있어 공(公)의 덕(德)은 높고 웅장하여라.
엄연(儼然)히 수주(水州)에 임(臨)하사 독실(篤實)히 가르치시고 윤리(倫理)로 펴시니
풍속(風俗)이 크게 변하고 지위(地位)와 명망(名望) 더욱 높아지셨네.
성(姓)을 하사(下賜)받고 작위(爵位)를 봉(封)하니 이름은 후대(後代)에 남고,
형상(形象)은 아름다운 공적(功績)을 생각케 하네. 지나간 일 아득하여라.
구름과 물 같이 맑으니 백성(百姓)들의 살기 좋은 곳이로다.
격식(格式)대로 된 유택(幽宅)을 보니 빗돌만 높이 솟아 오랜 세월 지워지지 않으리.

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겸세자이사 덕은 송환기 찬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世子貳師 德隱 宋煥箕 撰)

통정대부행인천도호부사 창원 황운조 서
(通政大夫行仁川都護府使 昌原 黃運祚 書)

숭정기원후3경신 2월 일입 15대손 성집 교검
(崇禎紀元後三庚申二月 日立 十五代孫 聖集 校檢)

서기2004년 8월 30일
문혜공(文惠公) 25세손(世孫) 원기(源基) 삼가 풀어씀.


문혜공 추모시

고려조에 있어서
공의 덕이 우뚝하고
엄숙히 수주에 이르러
독실하게 훈도하여 인도하니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고 베풀어
짐승같은 악습을 깨뜨려 버렸다.
자리와 명망이 더욱 무거워짐에
사성과 작위를 받았도다.
세상은 바뀌어도 이름은 남는 것
빛나는 공적을 생각하면
지난 일이 아득하다.

구름과 물은 더불어 흰빛인데
마땅히 백성들은
묘소를 우러러보고
비석이 우뚝 서 있어
영세토록 그 덕이 불결칠 것이다.

글 : 통정대부 인천 도호부사 창원 황운조


이세 휘 흡(二世 諱 洽)>

공(公)은 고(考) 시조(始祖)이신 문혜공(文惠公) 휘(諱) 영규(永奎)의 장자(長子)이시며,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2년 병자[丙子:1276] 문과(文科)에 급제 하시고, 충숙(忠肅), 충혜(忠惠) 양조(兩朝)에 벼슬이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정당문학 찬성사(政堂文學 贊成事)이시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 대사헌(大司憲) 규(珪)의 여(女)이시고,
장자(長子)는 휘(諱) 원개(元凱) 봉상대부 사헌부집의 삼사좌사 서경유수 중서시랑 평장사(奉常大夫 司憲府執義 三司左使 西京留守 中書侍郞 平章事), 차자(次子)는 휘(諱) 문개(文凱) 중직대부 종부령(中直大夫 宗簿令)이시다.

분묘(墳墓)는 실전(失傳) 미상(未詳)으로 시조(始祖) 문혜공(文惠公) 묘역(墓域) 아래 설단(設壇)에 봉사(奉祀).


시조 최영규의 관력 남부전서 기록에 대하여

1. 위키백과 '수성 최씨'조에 '남조전서(南曹典書)'를 역임했다고 되어 있다. '남조(南曹)’는 '예조(禮曹)'를 가리킨다.
2. 1760년에 간행된 <수성최씨족보> 권1(목판본 2권 2책)에 '남부전서(南部典書)'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보임. 崇祿大夫南部典書 有功으로 기록
3. 그런데 1860년에 간행된 <수성최씨족보>(목판본 7권 7책)에는 '형조전서(刑曹典書)'라고 되어 있음. *국립중앙도서관 <수성최씨족보> - 崇祿大夫 刑曹典書 兼 寶文閣 大卿으로 기록
4. 1860년에 간행된 <수성최씨족보>에 실려 있는 <수성백문혜공신도비명>에는 '관직이 전서[官典書]'라는 기록만 있지 '남부전서'나 '형조전서'라고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음.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남부 전서라는 관직은 남조전서의 오기 같다.
구전되어 오던 것을 1760년대에 기록을 하다보니 잘못 기록 될 수도 있고 남조와 남부를 함께 사용할 수도 있겠다. 다만 典書라는 관직은 조선 초에도 판서를 典書라고 했다.
관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이 아닌가, 시조께서 수원의 풍속을 다스려 충효의 도시로 거듭나게 하셨고 충렬왕께서 사성으로 수성 최를 봉하시며 화성을 전시(사패지)로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남부가 아니라 남조로 보이며 '남조(南曹)’는 '예조(禮曹)'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