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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岩先生遺稿(봉암선생유고)
擬栗里詞三篇(의율리사3편)※ 註:栗里[或柴桑村](율리[시상촌])는中國 晋代(중국 진대)에 隱士(은사:숨은 선비)로 有名하던 陶潛[字:淵明,號:五柳先生](도잠[자:연명,호:오류선생])이彭澤縣令(펑쩌현형)으로 있다가 뜻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歸去來辭(귀거래사)를 지어 읊으며 故鄕(고향)에 돌아와 국화를 심어 술 빚어서 마시고 鷳(한)이라는 새를 벗삼아 거문고를 타며 悠悠自適(유유자적)하였다.

1. 風雨凄凄欲降霜, 栗里村在何方, 五柳深掩柴荊門, 是非不曾到菊黃, 何以破吾醒酒一樽, 何以亂吾耳琴一張, 一張琴一曲猶堪論羲皇, 一樽酒一夢猶堪見君王.
1. 풍우는 써늘하여 서리가 내리려는데, 율리촌은 어디에 있느냐, 다섯그루 버드나무가 싸리문을 깊이 가렸으니, (세상의)시비가 (울타리의)황국에 더이상 이르지 않는도다. 무엇으로 나를 또 취하게 하리오? 술이 한동이오! 무엇으로 내 귀를 요란하게 하리요? 거문고가 한장이다! 거문고 한 곡조에 희황을 논하고, 한동이 술을 마시고 꿈에 우리 임금을 보노라.

2. 風雨漠漠日欲昏,何處是栗里村,柴桑江水淨如練,塵埃不曾到衡門,交契何所托鷳一隻,素心誰相對月一輪, 一輪月願隨孤影照至尊,一隻鷳願與長鳴訴哀寃.
2. 풍우 막막하고 날은 저물고자 하는데, 어느 곳이 율리촌이냐, 시상강물은 깨끗하여 비단 같으니 티끌조차 형문에 이르지 못하리, 누구를 친구로 사귀랴 한이란 새가 한마리 있구나, 깨끗이 비운 마음은 누구를 대하리오 달이 한바퀴 떠도는구나, 한바퀴 도는 달을 따라 우리 임금께 孤影을 비춰주기 바라며, 한마리 한새와 더불어 울며 이 哀寃을 호소해 보고싶구나.(寃:억울한 죄로 원통함을 뜻하는 글)

3. 天色寒夜色闌, 栗里處士去不還, 去不還 綠水及靑山, 靑山何所有出峀雲, 綠水何所有垂釣竿, 峀有雲身將淸影同漫漫, 竿有釣淚隨垂絲共澘澘.(闌:난;遮面,晩,盡. 澘:산:눈물흘리다)
3. 하늘 빛은 차고 밤 빛은 늦었는데, 栗里處士는 가고 돌아오지 않는구나,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은 綠水와 靑山에 있음이니. 청산은 어떤 곳인가 메뿌리에 나오는 구름이 있고, 록수는 어떤 곳인가 낚시대를 드리는 곳이라, 메뿌리 구름과 몸은 장차 맑게 갤 것이고 또한 한가로이 될 것이며, 장대에 드리운 눈물은 낚시줄 따라 함께 잠기리라.(澘=潛으로 해석했음)

(鳳岩公께서 고려 충렬왕30년 갑진[甲辰]에 나셔서 春秋 40이 넘도록 관로[官路]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하륜[河崙] 권중화[權仲和](2인 공히 이조에 정승[政丞]이 됨) 이첨[李詹] 등 여러 문생[門生]과 더불어 정주지학[程朱之學]을 탐구[探究]하시다가 다시 경국제세의 대지를 지니시고 공민왕2년 계사[癸巳]에 文科에 及第하신 후 벼슬이 司憲府 執義로부터 西京留守 門下侍中 同平章事에까지 이르시는 동안에 왕은 괴승[恠僧] 신돈[辛旽]을 국사[國師]로 신봉[信奉]하여 국정[國政]이 날로 그릇됨을 보시고 분연[忿然]이 18조의 시폐소[時弊疏]를 세번이나 왕에게 상소[上疏]를 하시다가 결국 왕의 노여움을 사서 청풍군으로 귀양까지 가시는 등 난정광정[亂政匡政] 에 헌신하시다가 왕이 23년만에 승하[昇遐]하시고 신돈의 아들 신우(신돈이 왕의 무자[無子]함을 기화[奇貨]로 임신중인 자기의 애첩을 왕에게 바쳐 낳았으므로 王禑라 함)가 왕위에 나가는 것을 보시고 선생께서는 辛氏朝政에서 벼슬하실 수 없다 하시고 그 아우되시는 종부령공과 더불어 長湍 鳳岩洞에 돌아가서 復興亭이라는 정자를 지으시고 문인들과 함께 詩禮講論으로 樂을 삼으시다가 이태조 일파에서 辛禑 辛昌 父子를 誅戮하고 다시 왕씨(공양왕名瑤)을 擁立하였으나 선생의 知友시요 兼하여 妻從叔되시는 圃隱公이 선죽교에서 무참한 해를 당한 후 국세가 더욱 기울어가는 것을 보시고 이 歌詞를 지으시고 悲憤慷慨하신 회포를 呼訴하는 동시에 문인들에게 행동을 삼가라는 당부를 하시고 공양왕 3년 辛未 8월에 春秋 88을 一期로 하시고 한 많으신 이 세상을 떠나신지 만1년인 壬申 7월에 고려 역사는 끝막았으니 선생께서는 고려왕조와 운명을 같이 하시니라 그 후 문인 李詹이 復興亭詩를 지어 선생님을 追慕하는 懷抱를 호소하였다.


復興亭時:이첨의 호는 雙梅堂이오 李朝議政事

日夕和風至
花柳舍奸姿
枋徨感前事
此亭空遺基
講論今寂寞
何人致於斯
江山更無主
小于易生悲

낮과 밤으로 화한 바람이 부니
꽃과 버들이 고운 자태를 머금었더니
이제와서 방황하면서 옛 일을 생각하니
이 정자는 빈터만 남았도다
글외는 소리가 이제 적막하니
누가 가시 이것을 이르리요.
강산에 다시 주인이 없으니
내가 이것을 슬퍼하노라


쌍매당 이첨(雙梅堂 李詹)의 생애
<2004년 7월14일 쌍매당 이첨 문화관광부 선정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이첨의 본관은 신평(新平)으로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이다. 그는 1345년 증참찬의정부사(贈參贊議政府事) 이희상(李熙祥)의 아들로 충남 당진군 신평에서 태어나 고려와 조선조 일곱 임금의 글을 지었다. 이첨의 고향 집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벼슬에 전념하다 몇 년 만에 돌아와 보니 소나무는 없고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어 호를 '쌍매당'이라 했다.

1365년(공민왕 14년) 그의 나이 21세 때 감시(監試)에 제2인으로 합격하였고, 1368년 24세 때 공민왕이 직접 주재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왕의 글을 짓는 예문 검열(藝文檢閱)이 되었고 고려 말까지 대간, 왕의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1375년(우왕 1년) 우헌납(右獻納)에 올라 권신 이인임(李仁任) · 지윤(池奫)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10년간 유배되었다. 1388년(우왕 10년) 이인임 등이 몰락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내부부령(內府副令), 왕명을 쓰는 예문응교(藝文應敎)를 거쳐 우상시(右常侍)가 되었으며, 1391년(공양왕 3년)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그는 목은 이색, 정몽주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정몽주가 조선 건국파에 살해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나 장류(杖流)된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첨의 문장력과 지식이 필요했던 조선왕조는 다시 그를 불러 전서, 집현전직학사 겸 지제교에 임용했다.

1398년(태조 7년)에 이조전서(吏曹典書)에 등용되어 동지중추원학사(同知中樞院學士)에 올랐다. 1400년(정종 2년)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로 전위사(傳位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2년(태종 2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하륜(河崙)과 함께 등극사(登極使)로서 명에 다녀왔다. 이 해에 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을 겸하였으며, 1403년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하륜 등과 함께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하였으며, 종이를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 ‘저생전(楮生傳)’을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문선’(東文選)에 많은 시를 남기고 있으며, 유저(遺著)로 쌍매당협장집(雙梅堂篋藏集) 25권이 있다. 그는 경전과 사학에도 능통한 시인이자 역사가이자 교육자로서 ‘제범(帝範)’, ‘사서절요(四書節要)’,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을 편찬했다.


삼세 휘 원개(三世 諱 元凱)
공(公)의 초휘(初諱)는 사위(士威)이시고,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30년 갑진[甲辰:1304]에 출생(出生)하셨으며, 고(考) 휘(諱) 흡(洽) 정당문학 찬성사(政堂文學 贊成使)의 장자(長子)이시다.
공민왕(恭愍王) 2년 계사[癸巳:135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와 판삼사(判三司) 좌사(左使)를 겸하셨다. 이때에 신우(辛禑)가 국병(國柄)을 도절(盜竊)함을 보시고 시중랑(侍中郞) 김사안(金士晏)과 더불어 벼슬을 사양하시고 장단(長湍) 봉암동(鳳巖洞)에 돌아와 복자당(伏雌堂) 삼간(三間)을 지으시어 문인(文人) 하륜(河崙), 권중화(權仲和)등 일백 육십 여인(餘人)과 더불어 날마다 시문(詩文)과 경학(經學)을 강론(講論)하셨다.
신우(辛禑), 창(昌) 부자(父子)가 주살(誅殺)된 후 하륜(河崙)등이 와서 말하기를 선생께서 조정(朝廷)에 나가시면 간신배(奸臣輩)는 물러가고 어진 이는 나오게 될 것이니 이는 국가(國家)의 대계(大計)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의 다행일까 하나이다. 하거늘 공(公)께서 탄식(歎息)하시며 말씀 하시기를 경순왕(敬順王)께서 나라를 태조(太祖)께 부강(附降)하신 후로 오백년(五百年) 동안에 국은(國恩)이 망극(罔極)한지라 내 어찌 나라를 생각하지 아니 하리오 마는 지금 반정(反正) 제신(諸臣)들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어 임금의 위엄이 날로 떨어지고 나라일이 날로 어그러질 뿐 아니라 강수(江水)가 적불(赤沸)하고 목마(木馬)가 해어(解語)하니 어찌 두렵고 삼가 않겠는가? 하시거늘 하륜(河崙)등이 그 뜻을 물으니, 강수(江水)가 적불(赤沸)하는 것은 사람에 적족지화(赤族之禍)가 있을 것이오 목마해어(木馬解語)는 나라가 바꿔질 조짐이라 하시고 시(詩)를 지어 보이시며 다시는 세상일을 말씀 안하신다 하시니, 하륜(河崙)등이 도리어 두렵고 부끄러워 하는 빛이 있더라.
공(公)께서 젊었을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시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시며 여러 서적을 널리 열람(閱覽)하시고 지략(智略)이 막힘이 없으셨으며 후학(後學)들에게 학문(學問)을 일깨우는것을 자기(自己)의 소임(所任)으로 삼으시니 사방의 학자(學者)들이 더욱 우러러 사모(思慕)하였다. 평생 언행(言行)이 원만 하셨으며 대의(大義)에 통하시고 사리(事理)에 밝으셔서 살림이 비록 공허(空虛)해도 뜻대로 하지 않으셨고 출입(出入)하실 때엔 항상 서적(書籍)을 가까이 하셨으며 벼슬에 계실때에는 법규(法規)에 맞는 바른 정치에 힘쓰시고 집에 들어 오셔서는 자애(慈愛)롭고 근검(勤儉)하신 마음을 베푸셨다. 당시에 풍속이 불법(佛法)을 숭상하는 사람이 많거늘 공(公)께서 깊이 염려하시어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본받아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조(先祖)에게 제사(祭祀)를 받드는 법을 가르치시니 세상에 염락(濂洛)의 좋은 풍속이 돌아왔다고 하였다.
공(公)께서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평장사(平章事)로 계시면서 18조목의 글을 공민왕(恭愍王)께 세 번이나 올리셨다가 임금의 진노(震怒)함을 사 청풍군사(淸風郡事)로 귀양 가셨다가 향리(鄕里)로 돌아오셔서 날마다 문인(門人)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강론(講論)하시고 혹 강호(江湖)에 노니시며 초탈(超脫)한 생활을 보내셨다. 조정(朝廷)에 나아가시면 경세제민(經世濟民) 하셨고 물러나 계실 때엔 학문(學問)을 강습(講習) 함으로서 진리(眞理)를 알고 실천(實踐)하는 것을 평생의 기량(技倆)으로 삼아 작록(爵祿)의 편안함 보다는 향촌(鄕村)의 궁색(窮塞)함을 즐거이 여기시어 근심을 잊으시니, 고산(孤山) 이존오(李存吾)가 대인군자(大人君子)라 호칭(呼稱)하셨다.
문인(門人) 이첨(李詹)의 구규지헌(九規之獻)과, 박사(博士) 김초(金貂)의 훼불지소(毁佛之疏)는 다 공(公)께서 저술하신 것이며, 만년(晩年)에 율리사(栗里詞) 삼편(三篇)과 훼불문(毁佛文) 이편(二篇)을 지으셔서 세상에 전하시니, 목은(牧隱)선생께서 항상 동료에게 말씀하기를 공(公)께서 신(辛)씨 조정(朝廷)에 벼슬하지 않고 마침내 암혈지사(巖穴之士)가 되어 명철(明哲)하게 보신(保身) 하셨으니 우리도 차라리 이사람의 높은 지조(志操)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율리사 3편

1. 風雨凄凄欲降霜, 栗里村在何方, 五柳深掩柴荊門, 是非不曾到菊黃, 何以破吾醒酒一樽,
풍우처처용상강, 율리촌재하방, 오류심암시형문, 시비부증도국황, 하이파오성주일준,
何以亂吾耳琴一張, 一張琴一曲猶堪論羲皇, 一樽酒一夢猶堪見君王.
하이난오이금일장, 일장금일곡유심론희황, 일존주일몽유심현군왕.

1. 풍우는 써늘하여 서리가 내리려는데, 율리촌은 어디에 있느냐, 다섯그루 버드나무가 싸리문을 깊이 가렸으니,
(세상의)시비가 (울타리의)황국에 더이상 이르지 않는도다. 무엇으로 나를 또 취하게 하리오?
술이 한동이오! 무엇으로 내 귀를 요란하게 하리요? 거문고가 한장이다!
거문고 한 곡조에 희황을 논하고, 한동이 술을 마시고 꿈에 우리 임금을 보노라.


2. 風雨漠漠日欲昏, 何處是栗里村, 柴桑江水淨如練, 塵埃不曾到衡門, 交契何所托鷳一隻,
풍우막막일욕혼, 하처시율리촌, 시상강수정여련, 진애부증도형문, 교계하소탁한일척,
素心誰相對月一輪, 一輪月願隨孤影照至尊, 一隻鷳願與長鳴訴哀寃.
소심수상대월일륜, 일륜월원수고영조지존, 일척한원여장명소애원.

2. 풍우 막막하고 날은 저물고자 하는데, 어느 곳이 율리촌이냐,
시상강물은 깨끗하여 비단 같으니 티끌조차 형문에 이르지 못하리,
누구를 친구로 사귀랴 한이란 새가 한마리 있구나, 깨끗이 비운 마음은 누구를 대하리오
달이 한바퀴 떠도는구나, 한바퀴 도는 달을 따라 우리 임금께 고영을 비춰주기 바라며,
한마리 한새와 더불어 울며 이 애원을 호소해 보고싶구나.(寃:억울한 죄로 원통함을 뜻하는 글)


3. 天色寒夜色闌, 栗里處士去不還, 去不還 綠水及靑山, 靑山何所有出峀雲, 綠水何所有垂釣竿,
천생한야색난, 율리처사거불환, 거불환 록수급청산, 청산하소유출수운, 녹수하 소유수표간,
峀有雲身將淸影同漫漫, 竿有釣淚隨垂絲共潜潜.[絲 = 綠자 같고, 潜潜=澘澘에 가깝쓰였음]
수유운신장청영동만만. 간유표루수수사공잠잠.

3. 하늘 빛은 차고 밤 빛은 늦었는데, 율리처사는 가고 돌아오지 않는구나,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은 녹수와 청산에 있음이니. 청산은 어떤 곳인가 메뿌리에 나오는 구름이 있고,
록수는 어떤 곳인가 낚시대를 드리는 곳이라, 메뿌리 구름과 몸은 장차 맑게 갤 것이고
또한 한가로이 될 것이며, 장대에 드리운 눈물은 낚시줄 따라 함께 잠기리라.

명(明) 홍무(洪武) 24년 신미[辛未:1391] 추팔월(秋八月) 임인일(壬寅日)에 장단(長湍) 봉암동(鳳巖洞)에서 졸(卒) 하시니 향년(享年) 88세 셨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 대언(代言) 문주(文周)의 여(女)이시며,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종질녀(從姪女)이시다.
장자(長子)는 휘(諱) 책(策), 판전교소윤 청송감무(判典校少尹 靑松監務)로 증(贈) 가선대부 병조참의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이시고, 차자(次子)는 휘(諱) 잠(箴), 전주목사(全州牧使), 남경유수(南京留守)시며 서(婿)는 평리(平理) 윤지겸(尹知謙)으로서, 이자(二子)를 두시니 원성백(原城伯) 개국공신(開國功臣) 기신(起莘)이고, 좌찬성(左贊成) 흥신(興莘)이시다.


봉암선생행장(鳳巖先生行狀)
公諱士威改諱元凱生於高麗忠烈王三十年甲辰恭愍王二年 癸巳登文科行司憲府執義兼判三司左使祖諱永奎元宗 二年辛酉登文科崇祿大夫南部典書有功忠烈王二十八年壬寅移封隋城伯賜姓崔氏諡文惠妣利川徐氏侍中郞文漢 之女生二男考諱洽忠烈王二年丙子登文科肅惠兩朝行政堂文學門下贊成事妣麗興閔氏珪女生二男時辛禑盜竊國 柄公與侍中郞金士宴(士宴卽本姓四從也)致仕退歸長端鳳巖洞搆成伏雌堂三間與門人河崙權仲和等一百六十餘 人日事詩文經學矣禑昌父子伏誅後河崙等來言曰先生登朝則陰類退而陽類進不啻宗社之大計抑又吾黨之幸願先 生處之公撫然嘆曰自我敬順王附降太祖之後幾至五百年勛在王室榮祿最殷何忘社稷但反正諸臣迭相爭詑權移主 威日非國事而且江水赤沸木馬解語寧不戒愼乎問何謂曰赤沸者人有赤族之幾解語者時有變龍之兆作詩以示之更 不言時事河崙等還有慙懼之色公少有大志姿魁偉性寬厚博覽群書略無礙滯勉進後學以興起斯文爲已任四方學者 尤所仰慕平生無疾言遽色不露圭角通大義明事理不顧生産雖至屢空不以爲意凡出入常以書籍自隨理官用規圓矩 方之政居家施慈仁恭儉之行時世俗專尙沙門之法公深慮吾道之塞使士庶倣朱文公家禮敎立家廟奉行先祀世稱 有濂洛群賢之風先是公以中書侍郞兼同平章事上十八條疏于恭愍王者三王怒謫授淸風郡事及還鄕里不治田宅日 與門人講論聖學或逍遙乎江湖之上放浪乎形骸之外立於朝而經濟退於野而講習以眞知實踐爲平生伎倆屣棄爵祿 色養怡愉窮居海隅樂而忘憂孤山李存吾之稱大人君子者此也門人李詹九規之獻博士金貂毁佛之疏皆公所述晩歲 著栗里詞三篇毁佛文二篇傳于世牧隱先生常語同僚曰公不仕辛氏之朝竟作巖穴之士可謂吾輩中明哲保身者寧追 斯人之高標也大明洪武二十四年辛未秋八月壬寅卒于長湍鳳巖洞享年八十八號鳳巖公配延日鄭氏代言文周之女圃隱 夢周之從姪女也女評理尹知謙子策判典敎府事配車氏生二男長曰涇次曰溫知謙有二子原城伯開國功臣起莘左贊成興莘   外孫 前朝臣章令 徐甄 謹書

공의 휘는 사위인데 원개로 고쳤다. 고려 충렬왕 삼십년(서기1304) 갑진에 태어나서 공민왕 2년(서기1353) 계사에 문과에 올라 행직으로 사헌부집의겸판삼사좌사요 조휘는 영규요 원종 2년 신유에 문과에 올라 숭록대부 남부전서로 공이 있어 충렬왕 28년(서기1302) 임인에 수성백으로 봉하고 최씨 성을 내리고 시호를 문혜라 하였다.

조비는 이천서씨 시중랑 문한의 딸이라 2남을 생산했다.
고휘는 흡이니 충렬왕 2년 병자에 문과에 올라 충숙 충례 두 조정에 행직으로 정당문학 문하찬성사요 비는 여흥민씨 규의 딸인데 2남을 낳았다. 때에 신우가 나라의 권세를 도족질하여서 공이 시중랑 김사안[김사안:사안은 즉 본성 사종이다]과 더불어 사직하고 물러나 장단 봉암동으로 돌아가서 복자당 삼간을 건축하고 문인 하륜, 권중화 등 160여 인과 더불어 날마다 시문과 경학으로 일삼다가 우와 창왕 부자가 죽임을 당한 뒤에 하륜 들이 와서 말하기를 "선생이 조정에 나오시면 음류[음류:나쁜 사람]가 물러나고 양류[양류:좋은 사람]가 등용되어 종묘사직의 대계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한 우리들의 행복이니 원컨데 선생은 생각하소서" 하니 공이 실심하여 탄식하기를 "우리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부한 뒤 거의 오백년에 이르도록 공훈이 왕실에 있었고 영화와 식록이 가장 성했는데 어찌 사직을 잊으랴.
다만 반정[반정:정도로 돌림]한 모든 신하들이 번갈아 가며 서로 다투며 자랑하고 권세가 임금의 위엄을 옮겨 날마다 국사가 잘못되어 가고 또한 강물이 붉게 끓고 목마가 말씀을 이해하니 어찌 경계하고 삼가지 않는가" 하니 묻기를 "어떤 것으로 붉게 끓는다 합니까?" "사람은 일족이 붉은 피로 물들 기미가 있고 시대는 용이 변할 징조가 있다" 하면서 시를 지어 보이시고 다시는 시사를 말하지 않으니 하륜 등이 도리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으며 자태가 훤칠하며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며 여러 서적을 널리 보아서 조금도 막힘이 없으며 후학을 권면하여 유도를 흥기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사방에 학자들이 더욱 앙모하였다. 평생에 급한 빛이 없고 모서리를 드러내지 않고 대의에 통하고 사리에 밝으며 가산을 늘리는 것은 돌아보지 아니해서 비록 여러 번 식량이 없었으나 생각에 두지 않고 무릇 출입할 적에 항상 서적을 가졌으며 관직에 있을 적에는 둥글고 모난 것이 법도에 맞게 했으며 가정에서는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행실을 행하였다. 그때 세속이 오로지 불교의 법을 숭상하니 유교가 막힌 것을 깊이 염려하여 선비와 서민들로 하여금 주문공의 가례를 따르게 하고 집에 사당을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세상에서는 염락[염락:염계에 있던 주돈이와 낙양에 있던 정호,정이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중서시랑 겸 동평장사로서 십팔조를 공민왕에게 세 번이나 올리니 왕이 노하여 청풍군사로 좌천시켰다. 향리로 돌아와서는 가산은 돌보지 않고 날마다 문인과 더불어 성학을 강론하며 혹은 강호의 가에 산보하며 세상밖에 방랑하였다. 조정에 돌아가서는 나라를 다스리고 구제하였고 초야에 물러가서는 학문을 강습하며 참되게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기량[기량:수완,솜씨]으로 삼고 벼슬과 녹을 헌신처럼 버리고 부모를 기쁜 안색으로 봉양하며 바다 모퉁이에 궁하게 살면서도 줄거워하여 근심을 잊으니 고산 이존오께서 대인군자라고 칭찬한 것이 이것이다.
문인 이첨, 김초가 훼불한 상소는 모두 공이 지은 바다.만년에는 율리사 삼편과 훼불문 이편을 지은 것이 세상에 전한다. 목은선생이 항상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공은 신씨의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마침내 암혈의 선비가 되었으니 우리들 가운데 명철보신한 자라고 이를 수 있다. 어띠 이 사람의 놓은 표상을 따르겠는가?" 하였다 대몀홍무24년(서기1391) 신미 가릉 팡월 임인에 장단 봉암동에서 졸하니 향년88이다. 호를 봉암(봉암)이라 한다. 공의 배위 연일정씨 대언[대언:벼슬이름] 문주의 딸이요 포은 몽주의 종질여이다. 딸은 평리 윤지겸에게 출가했고 아들 책은 판전교부사요 배는 차씨이니 2남을 낳았다. 장남은 경이요 차남은 온이요 지겸은 2자를 두었는데 원성백 기국공신 기신과 좌찬성 흥신이다. 외손 전조의 신하 장령 서견이 삼가 씀

高麗恭愍朝崔公士威爲西京留守政通人和恩威並著風姿雅麗以文學顯於世官至中書侍郞 同平章事兼判三司左使辛氏朝人咸稱君子之明快者而或稱西浦先生或稱鳳巖先生盖鳳巖洞在長湍府 西江連浦西岸漁船往來處也初忠烈公金方慶與樞密事金延佑世居玆洞元宗末年金公永奎出誨西京學 徒時鳳凰雙鳴于大壯洞巖後生金士衡士宴士亮及崔公士威時人以大壯洞稱爲鳳巖洞或稱鳳凰巖侍郞 公不仕僞朝以興起斯文敎誨禮義爲己任門生河崙等號公曰鳳巖先生堂曰伏雌亭曰復興莫非寓意處也 門生李詹復興亭詩曰 日夕和風至 花柳含姸姿 彷徨感前事 此亭空遺基 講說今寂寞 何人致於斯 江山更無 主 小子易生悲

고려 공민조 최공 사위는 서경 유수가 되어 정치가 통명하고 사람이 화목하며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드러났고 퐁도와 자태가 맑고 고우며 문학으로써 세상에 드러나서 벼슬이 중서시랑 동평장사겸 판삼사좌사에 이르렀다.신씨 조정에 사람들이 모두 군자로 명쾌한 자라고 창찬하며 혹은 서포선생 혹은 봉암선생이라고 칭하였으니 대저 봉암동이 장단부 서강 연포 서쪽언덕 어선이 왕래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렬공 김방경이 추밀사 김연우와 더불어 이 동리에 대대로 살았는데 원종 말년에 김공 영규가 서경으로 나가 학도들을 교육할 때 봉황 한 쌍이 대장동 바위 뒤에서 울고 김사형 사안 사량과 몇? 최공 사위가 출생하니 당시에 사람들이 대장동을 봉암동이라 칭하고 혹은 봉황암이라고 칭하였다. 시랑공이 위조[위조:우왕조정]에서 벼슬하지 않고 사문[사문:유학]을 일으키고 예의를 가르치는 것으로써 자기 책임으로 삼았는데 문생 하륜 등이 공을 봉암선생이라 하고 집을 복자당 정자를 부흥이라 불렀으니 의미를 붙인 곳 이님이 없다.

문생 이첨의 부흥정 시에 가로대

낮과 밤으로 화한 바람이 이르니 꽃과 버들이 고운 자태를 머금었다. 방황하며 지난 일에 강동하는 것은 이 정자 비어서 터만 남은 것 강론하던 말씀 지금은 적막하니 어떤 사람이 여기에 이를까. 강산에 다시 주인이 없으니 소자[소자:문생]가 슬픈 마음 쉽게 생기네.

恭愍王五年丙申以都評議司事崔士威移尹西京巡問其道公御兵撫民威惠益著王甚嘉之 明年丁酉二月進拜中書侍郞兼同平章事公以文武之才掌其西北管鑰未幾九相 銀臺出按是道政通 化行百廢俱興悠悠功利滔滔惠澤補導其君德誘掖其民俗當時稱之有箕子遺風焉

공민왕 5년 병신(1356)에 도평의사사 최사위로써 서경에 윤으로 삼아 그 도에 순행하며 물을 적에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성을 어루만져 위엄과 은혜가 더욱 나타나니 왕이 심히 사상히 여겨 명년 정유 2월에 중서시랑겸 동평장사에 임명하니 공은 문무를 겸한 재주로써 그 서북의 관문을 맡은지 얼마 안되어 은대[은대:승정원의 별칭]로 들어와 재상이 되고 나가서 이 도를 다스려 정사가 통해지고 교화가 행하여 백 자지 망가진 것을 다 일으켜서 길고 긴 공리와 크고 큰 혜택으로 그 임금의 덕을 보좌하고 인도하며 그 백성의 풍속을 인도하고 도왔으니 당시에 칭찬하기를 "기자의 유풍[유풍:끼친 풍화]이 있다"고 하였다.


나주임씨 문중 기록
소윤공(少尹公) 휘 봉(鳳) 사적(史蹟)
나주인(羅州人)으로 소윤(少尹)은 탁(卓)의 아들이고 호군(護軍) 선(宣)의 손자이며 불훤재 문정공(文貞公) 신현(申賢)의 문하생이다. 여말에 벼슬이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 종四품)이다. 일찍이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김제(金濟), 김혁(金革), 이석(李碩), 최원개(崔元凱), 신덕린(申德隣), 김주(金澍), 탁신(卓愼), 구영검(具榮儉), 김중방(金仲滂), 송인(宋寅)등 신자문인(申子文人)들도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교유(交遊)하였다.《華海師全》

드디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건국됨에 찬역(簒逆)의 무리와 하늘을 함께 일(대(戴)) 수 없어 부친을 뫼시고 아들 시소(始巢)와 유소(有巢)를 데리고성향(姓鄕)인 나주 회진(會津)으로 돌아가 그 절의(節義)를 온정히 하였다.《世譜》

아들 시소(始巢)는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을 좇아 학문을 수학,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다.「화해사전(華海師全)」에는 정포은선생과 옛 성인 요(堯)·순(舜)·우(禹)의 심법(心法)에 대한 문답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말에 벼슬이 서반(西班)의 보승산원(保勝散員 : 정八품)이었으나 《世譜》고려의 운이 다함에 미쳐 스승 정포은이 혁명역도에게 참화를 당하고 마침내 조선조가 건국되자 조부와 부친으로 더불어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광주이씨 문중 기록
994년 12월 6일자 국숭의회(國崇義會)에서 출간한 여말 충의열전(麗末 忠義列傳)의 서책이 화해사 전(華海師 全)에 의거한 바 이 책에 실려있는 둔촌 이집(遁村 李集)선생이 신문정공 현(申文貞公 賢)의 제자로 화해사 전 편집에 참여하였다고 되어 있다. 화해사 전(華海師 全) 권5 제자논찬(諸子論贊)을 살펴보면 둔촌 이집(遁村 李集) 외 16인의 이름이 보인다. 동서(同書)에 의하면 신현(申賢)은 그들의 스승으로서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였고 나아가서는 설총(薛聰)ㆍ최충(崔沖)ㆍ김양감(金良鑑)ㆍ안유(安裕)ㆍ우탁(禹倬) 등으로 이어지는 동방유학(東方儒學)의 도통(都統)을 계승하였다.

994년 12월 6일자 국숭의회(國崇義會)에서 출간한 여말 충의열전(麗末 忠義列傳)의 서책이 화해사 전(華海師 全)에 의거한 바 이 책에 실려있는 둔촌 이집(遁村 李集)선생이 신문정공 현(申文貞公 賢)의 제자로 화해사 전 편집에 참여하였다고 되어있다. 화해사 전(華海師 全) 권5 제자논찬(諸子論贊)을 살펴보면 둔촌 이집(遁村 李集) 외 16인의 이름이 보인다. 동서(同書)에 의하면 신현(申賢)은 그들의 스승으로서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였고 나아가서는 설총(薛聰)ㆍ최충(崔沖)ㆍ김양감(金良鑑)ㆍ안유(安裕)ㆍ우탁(禹倬) 등으로 이어지는 동방유학(東方儒學)의 도통(都統)을 계승하였다.

본서의 내용은,

천편(天編)에는,
1. 본조문대(本朝問對)
2. 원주문답(元主問答)
3. 명조문대(明朝問對)
4. 비모(備耗)
5. 출처(出處)

지편(地編)에는,
1. 제자문답(諸子問答)
2. 제자논찬(諸子論贊)
3. 가범(家範)
4. 제자서술(諸子敍述)
5. 홀서주대(笏書奏對)
6. 사전계사(師全繼辭)
7. 발미(跋尾)

인편(人編)에는,
1. 가학(家學)
2. 후왕고충정사(後王誥忠情辭)
3.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
4. 후왕읍변진정문(後王泣變陳情文)
5. 세헌(世獻)
6. 대제학상소(大提學上疏)
7.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8. 부언지록(附言志錄)
9. 운곡거의(耘谷居義)

※ 본책은 20세손 신세휴(申世休)가 중심이 되어 간행한 초간본에 의하였다.

<호서 비인현 본(湖西 庇人縣 本)>
본서 말미에 의하면화해사 전(華海師 全)은
화해사(華海師 ), 즉 동해(東海)와 중화(中華)의 사(師)의 언행(言行)을 집전(諿全)한 서(書)란 뜻이고, 이집(李集)ㆍ성여완(成汝完)ㆍ민사평(閔思平)ㆍ최청(崔淸)ㆍ원송수(元松壽)ㆍ송명의(宋明誼)ㆍ임즐(林騭)ㆍ이양소(李陽昭)ㆍ김약시(金若時)ㆍ최원도(崔元道)ㆍ조승숙(趙承肅)ㆍ정인언(鄭仁彦)ㆍ김치(金峙)ㆍ탁신(卓愼)ㆍ최양(崔樣)ㆍ최원개(崔元凱)ㆍ원천상(元天常) 등이 편집한 것을 정포은(鄭圃隱)이 여말(麗末)의 은사(隱士)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에게 전한 것을 복애 범세동(伏厓 范世東)과 함께 편집한 것이라 한다.

최원개 수성인 출처 기자와 미자의 봉토문제로 신현과 문답 제자논찬을 모아서 남겼다.